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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족의 어른들을 위한 명심보감 세꼭지 / 오흥범 칼럼
작성일 : 2017-12-03 22:09
이메일 : ozcorpo@hanmail.net
글쓴이 : 오흥범/부회장 조회 : 6,863  

 

 

 

한족의 어른들을 위한 명심보감 세꼭지

 

 

문화관광신문(주) 부회장 오흥범

 

약15 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탄생한 인류는 5~8 만 년 전 북쪽으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북상한 인류(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중 후에 우리 한민족의 주류가 되는 인류들은 동식물이 풍부하여 먹을 것이 가장 많았던 시베리아(알타이산맥 동쪽-바이칼호 서쪽주변) 지역을 생활터전으로 삼았으니, 이곳이 구약성서에 에덴(지도 참조. 4대강이 흐르는 곳)이라고 기록된 지역이다. 환단고기에는 '사백력/하늘'이라 기록된 곳이다.

 

그러나 지구가 대홍수를 거치고 빙하기를 맞게되면서 기온이 하강하였다. 최종빙기최성기의 시베리아 지역은 영하 50도에서 영하 60도를 오르내리는 극심한 추위를 맞게 되었다. 그런데, 가장 살기 좋았던 하늘(시베리아(에덴))은 사방이 전부 얼음으로 둘러 쌓여 고립되는 바람에 우리 선조인 샴족(=환족, 한족)들이 빙하지대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탈출구가 전혀 없었다. 물론 시베리아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살던 인류는 추위를 피해 비교적 따뜻하고 먹거리가 풍부한 곳으로 옮겨갈 수 있었으나, 우리 선조가 되는 인류(샴족)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시베리아의 극심한 추위를 피할 곳이 없었다. 영하 60도를 오르내리는 극심한 추위 속에서 우리의 선조들은 신체의 열손실을 최대한으로 줄여야만 살아 남을 수 있는 최악의 생존환경에 직면하게 되었다. 결국, 살아남기 위해 우리 선조들은 신체의 표면적을 줄여 열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극단적으로 신체의 외형을 줄이는 신체적 진화를 감내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인위적으로 신체를 줄였다기 보다는 상대적으로 신체가 작아 열손실로 인한 동사를 면한 사람들만이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었고 결국 신체가 작게 태어난 후예들만 살아 남았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 되겠다. 그러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체가 최소화되는 진화를 거듭하면서도, 샴신(=삼신할머니)의 보호가 있어서, 몸은 작아져도  샴족들의 뇌용량은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 까닭에 시간이 갈수록 지능은 오히려 더 높아지고 지혜롭게 되어 문명을 일으킬 수 있는 바탕을 갖추게 되었다. 

 

혹한의 시베리아(바이칼호 서쪽)지역이었지만, 그래도 비교적 덜 추운 지역에 여럿이 함께 모여 살다보니 의사소통을 위해 샴족들은 인류 최초로 언어생활을 시작하였다. 기온이 너무 낮아 손이 얼어서 이미 개발해서 사용하던 (당시의 첨단무기였던) 마제석기를 가공하는 것조차 포기한 샴족들은 어쩔 수없이 태초에 쓰던 타제석기를 다시 사용하면서, 지도자인 샤먼(삼신할머니와 영통하는 지도자, 무당)의 가르침을 따라 모계사회를 이루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혹한기를 누대를 거듭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샴족은 불을 발견하여 극심한 추위를 극복할 수 있었다. 동굴 속에서 손쉽게 단백질을 얻기 위해 늑대를 길들여 개로 만들어 가축화 하였다.


유구한 세월이 지나는동안 선조(샴족)들의 일부는 모계사회를 마감하고, 부계사회를 시작하였고, 섬기던 신(지도자)도 여신인 샴(샴신=삼신할머니)에서 남신인 환(=하느님, 환님)으로 바뀌었다. 신이 바뀜에 따라 스스로를 칭하던 족명도 샴족에서 환족으로 바꾸고, 모성적 분위기로 통치하던 사회를 남성적 분위의 정치적 세력화된 사회를 이루면서 나라이름도 환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6만년 전부터 지구 기온이 상승하면서 간빙기가 시작되었다.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빙하가 일부 녹게 되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가는 탈출구가 발견되었다. 신흥정치세력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있으면서도 여신인 샴신(=삼신할머니)을 섬기면서 모계사회를 계속하던 세력들은 남신 환님을 섬기는 세력과 길을 달리하여 하늘(사백력/시베리아/에덴/에리두)에서 땅(동유럽)으로 내려걌다. 드 후에도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세력들은 약 6천년 전까지 계속하여 땅(서남아시아(메소포타미아), 동북아시아 또는 베링해의 얼음을 밟고 아메리카까지)으로 하강하였다. 

그들 중에 서남아시아의 메소포타미아지역으로 남하한 세력은 그곳에 터전을 잡고 살고 있던 현지 인간(빙하기의 극심한 추위를 모른 채 따뜻하고 먹을 것이 많던 메소포타미아지역이라 체형을 줄이는 진화과정을 겪지 않아서 신체도 크고 옷도 없이 벌거벗은 채로 살면서 언어도 없이 짐승과 다름없는 미개한 원시생활을 하고 있던 사람)들을 발견하였다. 샴족은 이들을 잡아다 가두어 놓고, 먹을 것을 주고 샴족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말과 초보적인 기능을 가르쳐서 노예로 만들었다. 노예들과 이주민인 자신(샴족)들을 구별하기 위해, 스스로를 하늘(시베리아)에서 강림한 신(엘, 엔릴, 엔키)으로 노예들에게 각인시켰다. 노예들을 인간이라 부르고 자신들은 인간을 만든 창조주(중동의 수메르신화=히브리 성경 속의 엘로힘)로 행세하면서 섬김을 받았다(한자를 발명하면서 이들 샴족을 한자로 수밀이국 이라고 쓰고 한국어(=샴어)로 수메르라고 발음한다). 이들 메소포타미아의 샴족들은 에집트의 정치권력을 장악했으나 현지인 집단이 아프리카의 흑인들이었던 관계로 현지인과 혼혈하면서 본래 검은머리의 새하얀 백인이었던 샴족의 피부도 검게 변하였으나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자손임은 계속 선언하고 있었다. 이 때, 에집트의 평민층도 아닌 떠돌이(히브리)  흑인 노예이던 유대인들은 노예생활이 너무 고통스러워 샴족의 선민사상과 샴신을 차용하여 샴신이 자신들을 노예(히브리)에서 해방시켜줄 것으로 믿게되었다. 반대로 그 언젠가부터 에집트의 지도자는 샴신을 잃어버리고 태양의 아들임을 선포하였다. 결국 샴신의 후예에집트 통치권력의 선민사상은 흑인노예였던 히브리인들의 전유물이 되고 말았다. 히브리성경(구약)은 샴족의 대홍수 전승을 받아들여 노아(수메르신화의 우투나피쉬팀)의 장자 셈(샴의 히브리 발음)을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적어 놓았다.


그러나 환국(하늘, 시베리아)의 권력을 차지한 한족의 선조들은 대부분의 빙하가 녹을 때(최종빙기)까지 하늘에 남아 생활하고 있었다. 그동안 하늘의 지배권력은 변천을 거듭하여 최종빙기 때에는 일곱 번째 한님(환인 정권) 시대를 맞이하기에 이르렀으며, 이 때 하느님(한인,단군신화 속의 환인천제)은 아들인 환웅을 시켜 하늘(시베리아, 사백력)에서 땅(동시베리아=동북아시아, 에덴의 동쪽)으로 환족 무리를 최종적으로 이동시키면서 하늘나라(한국=환국, 에덴) 시대를 마감하였으니, 이는 지금으로부터 약6 천년 전의 일이다. 

 

환웅은 아버지인 환님(하느님, 환인)으로부터 받은 천부인과 풍백, 우사, 운사와 함께 환족무리를 거느리고 홍익인간제세이화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 하늘(시베리아/사백력)에서 땅(동시베리아, 동북아시아)으로 하강하여, 오래 전 하늘에서 먼저 땅으로 내려와 살던 선주민(샴족)들을 무력(석기)으로 정복하고 새로운 환국을 개국하였다(B.C.4,370년경).


그 후, 환족과 샴족은 다시 결합하면서 혼혈이되어 하늘에서 내려온 환족은 족명을 한족으로 변경하고 천자의 이름도 환웅에서 한웅으로 바꿔부르게 되었다. 동북아시아에 정착한 한족은 시간이 흐르면서 광물이 포함된 암석을 고열의 불에 녹여서 청동기를 만들어 내었으니, 이는 인류 최초의 청동기문명을 한족이 시작한 것이었다. 청동기문명이 발생하면서 청동무기를 기반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던 풍백(군신) 치우씨는 한웅천왕이 갖고 있던 정치권력을 탈취하였고, 천황으로 등극하였으니 이 이가 바로 치우천황이다. 청동기 문명은 더욱발전하여 철기문명시대가 활짝 피었다. 철기로 무장한 군대를 기반으로 치우천황은 한족의 나라를 지금의 중국 본토(산동성)로 이전하였으니 산동성 지역의 청구를 수도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본래 하늘(시베리아/에덴)에서 땅(동시베리아/동북아시아)으로 내려올 때 하늘을 비워놓고 왔던 과거와 달리, 치우천황은 동북아지역을 한웅천왕의 후예에게 물려주고 제후로 삼았다. 이렇게 치우천황이 따로 떼어 한웅의 후예 단을 제후로 봉하여 시작된 동북아제후국 조선(명(=이씨조선)이후 최근까지는 고려로 불림)은 그 명칭은 바뀔지언정 14세기인 송대까지 계속되었다. 물론  송대에는 황실의 혈족을 동북아국의 제후로 책봉하였으나 본국 송에 종속되지 않고 독자적인 문화와 과학기술을 개발하며 번영하였었다. 그런데, 치우천황의 동북아 제후국 조선의 첫 제후는 한웅의 후예였으나 성은 한씨가 이니라 단씨였으니 바로 단군임검(왕검)이다. 그 사유는 7만년 전 한족이 하늘(시베리아)에서 샴신을 섬기는 모계사회부터의 베필이었고 모계사회를 계속하던 샤먼(웅녀/웅씨)의 직계 후예들은 환인의 시대가 열리면서 빙하가 녹을 때인 6만년 전에 하늘에서 나와 지금의 동유럽(예니세이강가)에 진출하여 별도의 세력을 가진 모계사회로서 살고 있었는데, 동북아시아로 이주한 환인의 후예 한웅이 그 곳을 방문했을 때 모계사회의 지도자인 샤먼을 만나 아들인 단을 낳게 되었다. 그리고 샤먼 웅녀는 한웅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단 외에는 자식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웅씨의 모계사회를 마감하고 아들 단을 지도자로 하는 부계사회를 시작했는데, 이 때부터 단씨가 그곳을 터전으로 하다가 동북아시아로 들어왔다. 치우천황이 청구로 수도를 옮기면서 바로 이 한웅의 후예 단씨에게 동북아시아(조선) 제후의 지위를 주고 다스리게 하였던 것이다. 이 때부터 동북아의 제후 단군은 그 지위가 신에서 인간으로 격하되었고 신인 왕검이라고 불렸다. 제후가 인간이 됨에 따라 제후를 보좌하던 만신도 공, 자, 백, 남 이라 불리우는 귀족으로 작호를 받게 되었다.

 

그 후 치우천황은 홍익인간 제세이화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철기로 무장한 군대를 이끌고 전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서쪽으로 진군하였으니, 바람의 신(풍백) 치우천황(=수메르신화의 TESUB=바람의 신=바빌로니아의 사르곤=성경 속의 모세)은 오래 전에 이주한 샴족(서남아시아의 수메르 권력자(엔릴 등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신(바람의 신=풍백)들을 정복하고 홍익인간제세이화의 하느님의 가르침을 토대로 한 제후국가를 건설하였다(B.C.2,700년경). 치우천황(=풍백)은 최강의 군대를 기반으로하여, 훨씬 오래 전에 하늘(시베리아)에서 땅으로 이주한 샴족의 나라들을 차례로 정복하여, 서부유럽을 제외한 전 세계에 제후국가를 세우고 바람의 신(=군신)으로 섬김을 받았다(서부유럽 정복을 앞두고 고령으로 서거).

 

세계 인류의 역사는 빙하로 둘러쌓인 시베리아(사백력,에덴)의 극심한 추위 속에서 샴신을 어머니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살던 한족(=샴족)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천자 한웅의 무리인 한족은 지구의 역사를 처음부터 써내려 갔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 선조인 한족들은 치우천황이 세운 세계제국을 경영하면서부터 최근까지도 홍익인간 제세이화라는 환인천제의 큰 뜻으로 자신들의 아이들을 가르쳤다. 


14세기 송황실의 속노였던 여진족 빠이엔티무르가 황위를 탈취하여 명(=이씨조선)을 세웠으나, 자신의 동족인 여진족의 압력에 못이겨 송(명)의 수도 평양(장안)을 같은 여진족에게 주어 청을 세우게 하고 자신은 지금의 북경으로 천도하였다. 그러나, 여진족들이 세운 명(=이씨조선)은 치우천황 이후 송대에 이르기까지 유지하던 한족의 세계제국을 피지배민족에게 다 빼앗기면서 해체를 거듭하였다.  명은 임진왜란 이후에는 지금의 북경마저 청에 내주고 치우천황때부터의 제후국 이던 동북아시아(명대의 명칭은 고려)로 급하게 후퇴하면서, 수도를 선양(봉천)으로 옮겼고, 고려의 영역은 만주 서부와 동시베리아를 명에 내주고, 지금의 만주 동북부, 한반도, 사할린과 북해도로 축소되었다. 빠이엔티무르의 후예인 여진족 황제는 선양으로 천도하면서 청의 압력에 굴복하여 명이라는 국호도 버리고 고려와 일본만을 제후국으로 거느리면서 국호도 없는 천자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다가 숙종때에는 시베리아 조차도 러시아에 할양하고(네르친스크조약) 버티다가 철종때에 멸망하였다. 철종이후 명의 제후였던 고종이 철종의 양자로 입적하면서 명의 황위를 계승하였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청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자 대한국으로 국호를 정하고 황제를 칭했으나 청의 반발로 간도를 제외한 만주를 다 청에 빼앗기고 한반도 한성(서울)으로 들어오면서 제후국 고려를 폐지하고 조선으로 국호를 칭하였다. 치우천황이 한국에서 떼어 조선으로 명명하고 한웅과 웅녀의 피를 받은 단씨를 제후로 책봉한 것에 착안하여, 여진족의 조선 임금 고종은 같은 여진족의 나라 청에게 한이라는 국명, 족명, 영토, 역사와 글자(한자)는 물론 한족의 위대한 선조인 치우천황마저 황제헌원 이라고 바꿔 청에게 주었다.


고종으로 기록된 여진족은 한국의 제후로 책봉되었던 한웅과 웅녀의 후예인 단씨의 조선을 따다가 조선으로 새로이 국호를 정하고, 한족 7만년 역사를 지우고 단군신화를 창작하면서 세계제국 한국의 역사를 한반도에 구겨넣고 다 잘라내었다. 그리고 한족이라는 족명도 한자도 여진족에게 주고 예맥족(한족)을 족명으로 알고 쓰게 만들었다. 한족을 예맥족으로 만든 여진족 임금 고종은 자신의 본관을 전주로 정하고 성은 이씨로 정하면서 명을 세운 자기의 선조 빠이엔티무르마저도 명의 태조 주원장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세워 청에게 떼어 주었다. 이에 한 발 더 나가 이씨 조선을 합병한 왜는 일선동조론을 앞세워 한국어마저 말살시키려고 하였다.(이상은 황영희 저, 과학기록으로 찾은 한국사 1.2.3.권에서 가져왔음을 밝힘)

 

그러나 한족의 역사는 송대에서 끝났어도 한족의 자녀교육은 이씨조선까지 계속되었다. 조선에서는 아이가 자라 글방(서당)에 처음 가면 천자문부터 가르쳤다. 아이는 처음부터 천자문이란 글을 배운 것이 아니라 천자문이라 이름붙여진 음률를 배웠다. ‘하나알-텬! 땅-지! 거무-련! 누루-황! 지-부! 집-주!.......’ 음률이 다듬어져서 암송이 자연스럽게 될 때까지는부 글자를 가르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음률을 넣에 암송이 될 때부터 - 상자에 모래를 담아 만든 글자연습 도구를 이용해 - 나뭇가지로 글을 쓰는 연습을 하면서 글공부는 시작되었다. 모든 책은 한자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천자문을 떼지 않고는 어떠한 책도 읽을 수가 없었다.

 

천자문을 다 떼면 어머니는 글방에 떡을 해서 들여보냈다. 이른바 ‘책거리’다. 책걸이에서 꺼내어 들고 외던 책을 다시 줄에 건다는 뜻이다(직접 글방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가구가 별로 없던 온돌 방에 줄을 걸고 그 곳에 책을 걸어두었는지 모를 일이다). 책거리는 이제 아이가 공부(학문)를 시작할 때가 되었다는 ‘신고식’이었다. 그러나, 천자문을 떼었다고 해도 아이는 바로 공부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인성을 먼저 닦아야 했다. 인성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글방의 훈장님은 공부를 가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학동)가 공부(학문)를 시작하기 전에 인성을 먼저 닦도록 선조들에 의해 준비된 교재가 바로 명심보감이었다. 글방에 들어온 아이(학동)가 천자문을 떼자마자 두 번째로 주어지는 책이 바로 명심보감이었다. 명심보감을 읽고 외고 그 뜻을 새겨서 마음과 몸에 담은 연후에 훈장의 평가에 따라 학동은 학도가 될 수 있었다. 현대적 교육기관에서 아이 때 가르치지 않는 ‘명심보감’은 바로 조상들이 자녀들을 위해 준비한 인성교재였다. 그 중에 현대의 어른들이 새겨야 할만한 부분을 세 꼭지만 추려 보겠다.

 

첫째꼭지

 

공자가 말하기를,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주고, 악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재화를 준다.”

 

예화 1.

 

이씨조선 선조 때, 정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 장가를 들어 새로 지은 옷을 입고 동무들과 함께 ‘운곡서원’엘 다녀오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길가에서 떨고 있는 거지아이를 발견하고 측은한 생각에 자기의 새 옷(周衣)을 벗어 거지에게 입혀가지고 가동(家童)을 시켜 데려다가 집에서 키우게 했다. 이 아이는 크면서 주인에게 매우 충성스러웠고 힘이 장사였다. 때마침 임진왜란을 당해서 사람들은 왜적을 피해 나루배를 타고 강을 건너 피난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룻배는 한 척뿐인데 건너갈 사람은 많아서 수백명이나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허둥지둥 그 배에 올라타고 강을 건너다 강의 중간 쯤에서 배가 뒤집혀서 가라앉았고, 사람들은 몰살을 당했다. 그러나 정협의 가족들은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가 데려다가 길러 준 거지아이가 얕은 여울목을 찾아 정협의 가족들을 한명 한명 등에 업어서 건네 주었던 것이다.

명심보감 맨 첫부분 계선(繼善)편에 실려 있는 글이다. 반대되는 예화는 생략한다. 선조들은 남을 돕는 것부터 시작한다.

 

 

둘째꼭지

 

“한 때 화나는 것을 참아 이기고 보면 앞으로 백 일동안 근심할 것을 면하게 된다.

 

예화 2.

 

초나라 장왕이 연회를 베풀어 신하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즐기던 어느 날 밤의 일이었다. 술이 여러 순배 돌아 바야흐로 주흥이 도도하고 흥취가 한창일 즈음 돌연 촛불이 꺼져 방안이 깜깜해지고 말았다. 이 때 왕의 곁에는 애첩이 그를 모시고 술을 권하고 있었는데 주위가 깜깜해서 바로 옆 사람도 분별할 수가 없었다. 이 틈을 타서 어느 신하 한 명이 왕의 애첩에게 입을 맞추었다. 왕의 애첩은 너무도 불시에 당하는 일이라 엉겁결에 그 신하의 갓끈을 잡아 떼고 급히 왕에게 아뢰었다.

“불이 꺼진 틈을 타서 어느 무례한 놈이 소첩에게 해괴한 짓을 하였아옵니다. 소첩이 그 놈의 갓끈을 잡아 떼었아오니 빨리 불을 켜고 그 놈을 잡아 엄벌하여 주시옵소서” 이 말을 들은 왕은 큰 소리로,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은 모두 갓끈을 뗄지어다. 만일 갓끈을 떼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크게 엄벌하리다” 하고 영을 내렸다. 모든 신하들은 전부 갓끈을 떼어 버렸고, 불을 켰으나 왕의 애첩에게 입을 맞춘 신하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신하는 목숨을 부지했다.

이런 일이 있은지 약 2년이 지난 후, 진나라가 초나라로 쳐들어 왔다. 초나라보다 훨씬 강한 진나라는 초나라 군사를 모두 무찌르고 승승장구 진격하여 초나라 운명은 바람앞의 등불처럼 위급한 지경에 처하였다.

초나라 장왕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어찌할 줄 모르는데, 갑자기 한 장수가 진나라 진영으로 달려들더니, 그 장수로 인해 진나라 군사의 진중이 어지러워지고, 그 장수는 진나라 장수들을 차례로 베면서 헤쳐나가니, 진나라 군사는 크게 패하여 많은 군사를 잃고 길을 다투어 도망하기에 바빴다.

진나라 군사를 저 멀리까지 쫓아 보낸 그 장수는 다시 돌아와 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왕은 너무나도 뜻밖의 일에 놀라 입을 열지 못하다가, 한참 후에야 “그대는 대체 누구인데 이런 이런 위급한 지경에 나를 도와 적을 무찔렀는고?” “예,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수년 전 연회석상에서 갓끈 뗀 일을 기억하고 계시옵니까? 바로 신이 그 때 죄를 지은 놈이옵니다.”

그 장수는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그 때 자기의 지은 죄를 벌하여 줄 것을 청하며, 자기는 그길로 산에 들어가 왕을 위하여 보답할 일을 생각하고 무술을 익혀 오던 중 오늘과 같은 일을 당했다는 것이었다(선조들은 어린 학동들에게 자연스럽게 어른들의 삶을 보여주면서 은연중에 성교육도 하고 있다).

 

셋째 꼭지 :

 

“만일 남이 나를 중히 여기게 하려면 내가 먼저 남을 중히 여겨야만 할 것이다.”

 

예화 3.

 

이조 인조반정 때의 일을 직접 자기 눈으로 보았다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김준이라는 사람은 광해주(광해군) 때 병조에서 늙은 이속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가 반정 때 목도한 일을 후일 동평위 정재륜에게 이야기하였다는 내용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광해군의 포학무도한 것이란 이루 말할 수 없어서, 철모르는 부녀자나 가동주졸(街童走卒)까지도 원망치 않는 이가 없었지만 막상 의거(義擧)가 있던 날 그가 강화도로 쫒겨가는 꼴이란 어찌나 행색이 비참한지 보는 사람이면 남녀 귀천을 막론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더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제까지 광해군 밑에서 신하로 있던 훈신들 중에는 슬퍼하거나 그를 동정하는 사람은 없고 모두 희희낙락해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일이 지나간 뒷날에 가서 보니, 슬퍼하던 사람은 모두 어질고 착한 사람들이어서 새 조정에 충성을 바쳤지만, 지나치게 기뻐하던 사람 쳐놓고 제 명대로 살다가 죽은 사람이 몇 명 없더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전 임금에 대해서 의리가 없던 신하는 새 임금에 대해서도 충성을 다할 리가 없는 모양이다(충신불사이군이라는 말은 호사가들이 지어낸 말이었나 보다).

 

여기 당시의 표본적인 이야기가 하나 있다.

반정하던 날 밤 입직하던 신하들은 모두가 혼비백산해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제각기 제 목숨을 도망하여 살 길을 찾고 있었는데, 그 수라장 속에서도 능양군 (후일의 인조(仁祖))을 붙들고 구주(舊主) 광해를 살려달라고 애원한 신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그 날 밤 입직승지였던 죽천 이덕형 이었다.

뒷날 인조는 특별히 교지를 내려 말하기를, “이덕형의 충의는 의거하던 날 내가 이미 알았노라” 하고 이덕형을 중용하였고, 이덕형의 벼슬은 판서에 이르렀다.

반정의 의거가 일어나 조정이 온통 수라장이 된 판국에 감히 누가 “구주 광해를 살려주십시오!”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새 주인에게 애원할 수 있을까? 이는 지극한 충성과 지극한 의리를 보여주는 이덕형의 일화이고, 이덕형을 알아본 능양군 인조의 인품이다.

 

남이 나를 소중히 여기게 하려면 그러기 전에 먼저 나도 남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하지만 자라서 겨우 문자(천자문)를 깨우친 어린 학동들에게 이런 심오한 내용이 포함된 예화들을 명심보감(명심해야 할 보감)이라고 이름붙여 가르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이와 같은 것을 어린 학동들에게 가르친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인성교육은 최첨단의 물질문명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성인들이 본받아야 할 모델이 아닐 수 없다. 가희 홍익인간 제세 이화의 통치이념으로 세계를 다스렸던 한족의 후예들이 아닐 수 없다.

참고문헌 : 황영희, 과학기록으로 쓴 한국사 / 이민수 옮김, 새로 풀이한 명심보감,(주)을유문화사, 1999.

이 글은 ‘세계여행작가’ 2집에 기고한 본인의 글 ‘샴족의 어른들을 위한 명심보감세꼭지’를 일부 수정하여 가져왔음을 밝힌다.

 

필자 약력 :

 

문화관광신문(주) 부회장 (현)

태화교육복지연구원 대표

운암평생교육원 학생주임교수 겸

학점은행제 법학부 겸임교수

외교통상부 소관: 한중경제문화친선협회 경인지부장

중국 요령성 본계금정집단중개유한공사 주한수석대표

풍성고속관광 주식회사 대표이사/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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